향아설위 (向我設位)
본 운동에서의 자리 — 연대지능의 주체
호혜가 옆으로 짜는 양식을 짚는 자리라면, 향아설위는 *옆으로 짜는 주체(자아)*를 짚는 자리다.
폴라니는 통합 양식을, 마르셀 모스는 증여 환을, 들뢰즈와 가타리는 리좀의 구조를 짚었으나, 짜는 자의 자리 — 그 “나”가 누구인가 — 는 비워 두었다. 향아설위는 그 비워 둔 주체론의 칸을 동학의 어휘로 채운다. 시장지능이 그 자리에 고립된 개인을 세우고 공공지능이 통치되는 인구를 세울 때, 연대지능은 다른 자아를 부른다. 호혜와 짝을 이루는 자리.
향벽설위에서 향아설위로 — 해월의 전복(1897)
전통의 향벽설위(向壁設位)는 신위를 벽 쪽에 모셨다. 죽은 조상이 저 벽 너머, 산 사람의 저편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해월 최시형은 1897년 이 자리를 돌려세웠다. 제사상을 벽이 아니라 산 사람인 나를 향해(向我) 차린다. 조상의 정신과 혈기가 저편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후손인 내 몸과 삶에 이어져 지금 살아 있기 때문이다. 시천주(侍天主) — 한울을 내 안에 모셨다는 동학의 근본 자리가 제례의 형식으로 귀결한 결이다.
설위(設位)는 자리를 베풂이다. 사회지능이 자리의 명명이라면, 향아설위는 그 자리를 어디에 베푸는가에 대한 토착의 대답이다 — 자리는 저편이 아니라 나에게 베풀어진다.
세 가지 미끄러짐의 경계
향아설위의 “나”는 고립된 개인이 아니다. 이 자아가 세 자리로 미끄러지는 순간 그 뜻을 잃는다.
- 개인주의 — 향하는 나를 자기 이익을 셈하는 원자로 읽으면, 호혜의 리좀이 원자들의 평면 그물로 납작해져 시장지능과 구별되지 않는다.
- 인간중심주의 — 그물을 사람만의 그물로 좁히면 경물(敬物)이 빠진 인간중심으로 굳는다.
- 속세주의 — 한울이 빠지면 한낱 세속 교환으로 떨어진다.
향하는 “나”는 그 반대다. 온 생명·우주·역사가 지금 내 안에 함께 와 있음을 자각한, 전체가 모여드는 매듭이다. 나를 향함이 곧 전체를 향함이다.
삼경(三敬) — 그물을 만물로
동학의 삼경이 연대지능의 그물을 사람 너머로 넓힌다. 경천(敬天)·경인(敬人)·경물(敬物) — 공경의 대상이 하늘과 사람을 넘어 만물에 이른다.
서구의 리좀이 사회적 그물이었다면, 향아설위의 그물은 먹거리·흙·생명까지 옆으로 짠다. 품아이(먹거리)와 품에(에너지)가 한 뿌리인 까닭, 탄소중립이 곁가지가 아니라 척추인 까닭이 이 자리에 있다. 삼경은 연대지능의 사상적 뿌리다.
한살림선언(1989)으로의 회복
연대지능 혁명이 발명이 아니라 회복의 운동이라면, 회복할 자리 하나는 두레·향약·품앗이의 관습만이 아니라 그것을 떠받친 자아 — 향아설위적 자아다.
장일순(무위당)과 김지하가 동학을 현대 생명사상으로 다시 길어 한살림선언(1989)으로 응결한 자리가, 바로 이 연대지능적 자아의 21세기 첫 회복이었다.
더 깊이 보려면 / 관련 자리
- 위키백과 — 동학
- 위키백과 — 최시형
- 관련 자리: 호혜 · 동학사상 · 해월 최시형(1827–1898) · 장일순(무위당) · 김지하 · 한살림선언(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