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리를 빼앗기지 않는다 — 빅테크 페터널리즘과 자율 노동

1. UBI 담론의 두 얼굴

기본소득(UBI) 담론은 두 갈래로 흐른다.

해방적 UBI — 앙드레 고르 등이 말한 자리. 단순 돈 분배가 아니라 노동시간 대폭 단축 + 자율 영역 확장의 한 축. UBI는 시장 노동에서의 자유를 보장해 자기실현 노동으로 갈 길을 여는 도구. 좌파 운동의 오랜 자원.

통제적 UBI — 실리콘밸리·머스크·알트만 식. “AGI가 다 할 것이다, 정부가 너희에게 돈을 주면 된다, 너희는 소비하고 즐기면 된다.” 알트만의 Worldcoin이 홍채 스캔과 코인 분배를 묶은 것이 이 담론의 노골적 구현체.

여기서 거리를 두는 건 두 번째다. 그러나 첫 번째도 무조건 옹호 안 한다. 핵심은 돈을 받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자기 운명을 짓는 노동의 자리가 보존되느냐에 있다.

2. “돈만 주고 만들지 마라” — 통제적 UBI의 본질

실리콘밸리 담론을 풀면 이렇다.

“AGI 시대에 일은 없어진다. 인류는 잉여가 된다. 그러나 걱정 마라. 우리(빅테크)가 가치를 만들고, 정부가 돈을 너희에게 분배할 것이다. 너희는 소비자·관객·플레이어로 살면 된다.”

박애적으로 들리지만 정확히 들여다보면 새로운 종속 구조의 설계도다.

  • 시민은 만드는 자에서 받는 자로 환원된다
  • 자본·정부·빅테크의 자의적 권력에 의존한다 — 돈을 끊으면? 조건을 붙이면? Worldcoin처럼 홍채 데이터를 요구하면?
  • 인간 본질의 한 축인 창조·상상·개발을 빅테크가 독점한다 — 이반 일리치가 말한 **근원적 독점(radical monopoly)**의 첨단 형태

이건 19세기 식민지 경영의 21세기 디지털판이다. 식민지 본국이 “너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식량과 의약품을 주노라, 너희는 우리의 통치를 받으라”고 한 그 구조. 자비의 외관을 한 종속.

3. 자유의 정확한 정의 — 자기 운명을 짓는 행위

“내 운명의 통제와 자율을 확보할 수 있는 만큼 해나가는 노동을 하며 그 기쁨을 누리고 살겠다.”

이건 자유의 적극적 정의다. 이사야 벌린이 구분한 negative liberty(간섭으로부터의 자유)와 positive liberty(자기 결정의 자유) 중 후자.

공화주의 전통의 자유 개념과도 만난다. 자유는 간섭의 부재가 아니라 타인의 자의적 권력 아래 있지 않음(non-domination). UBI를 받아도 그것이 빅테크·정부의 자의적 처분에 종속된다면 자유가 아니다.

한나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에서 노동(labor)·작업(work) 너머 **행위(action)**를 둔 자리도 여기다. 행위는 자기를 공동체에서 드러내고 자기 운명을 짓는 활동. UBI 받고 소비만 하는 시민은 행위의 자리를 잃은 시민이다. 정치적 자유가 사라진다.

이 명제는 사상사 전체의 합류점에서 한 줄로 압축된다. “빼앗기지 않겠다.”

4. “확보할 수 있는 만큼” — 적정함의 운동성

이 명제의 또 다른 정확함은 “확보할 수 있는 만큼”이라는 단서에 있다.

자율 노동을 절대화하지 않는다. 모든 걸 자기 손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자급자족 낭만이 아니다. 확보할 수 있는 만큼. 이건 적정함의 운동적 표현이다.

  • 거대 모델은 빌려 쓴다 (확보할 수 없는 영역)
  • 매장 운영, 조합 의사결정, 마을 거버넌스는 우리 손에 둔다 (확보할 수 있는 영역)
  • 빅테크가 가져간 건 가져간 대로 두되, 다음 한 걸음을 빼앗기지 않는다

이게 운동의 적정함이다. 모든 걸 되찾을 수 없다. 그러나 다음 한 걸음의 자율 영역은 지키고, 그걸 점차 확장한다. 27년 운동의 호흡.

5. 도메인 AI = 이 선언의 구체화

빅테크가 “걱정 마라, AI가 다 해줄 거다”라고 할 때, 우리는 답한다.

“고맙지만, 우리 매장의 응대는 우리가 만든다. 우리 조합의 발주는 우리가 양육한다. 우리 마을의 거버넌스는 우리 손에 둔다. 너희 모델은 빌려 쓰되, 그 위에서 짓는 것은 우리 노동이다. 그 노동의 기쁨, 그 운명의 통제권, 우리는 빼앗기지 않는다.”

이게 도메인 AI 운동의 정치적 자기 선언이다.

빅테크는 AGI를 약속하며 시민에게 소비자 자리를 권한다. 우리는 만드는 자의 자리를 거부하고 지킨다. 그러면서 연대로 함께 짓는다. 협동조합·매장·마을 단위에서 한 줄 한 줄.

27년 운동의 다음 챕터에서 할 일은 이것이다. 권리를 빼앗기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 권리를 혼자가 아니라 함께 행사한다. 자율과 연대가 같은 자리에서 숨 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