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구 선택의 윤리 — 빌려 쓰되 어디서 빌리느냐
1. 빈 자리에 답하기
자율 영역의 도구로서 도메인 AI를 짓는다 했을 때, 한 가지 빈 자리가 남는다. 빅테크 인프라를 빌려 쓰되 종속 안 된다고 했지만, 그럼 어느 빅테크를 빌리느냐? 이 질문에 답하지 않으면 운동이 추상에 머문다.
답: 이왕이면 사회적 책임을 가장 진지하게 설계한 곳을 빌린다. 사회적기업 거래·공정무역·조합원 매장 이용과 같은 결의 윤리적 선택이다. 도구를 쓰되, 도구를 만든 자의 거버넌스도 본다.
2. 한 행위자가 다른 네 가지를 시도한다 — Anthropic의 사례
① 법인 구조 앤트로픽은 델라웨어 PBC(Public Benefit Corporation)다. 정관에 “주주 이익 + 공익”을 동등하게 추구하도록 박혀있다. 단기 주주 압박에 휘둘리지 않게 거버넌스 설계. 거기에 더해 Long-Term Benefit Trust — 다섯 명의 외부 신탁이사가 시간이 지나면 이사회 다수 의석을 임명할 권한을 가진다. 자기 발목에 족쇄를 채우는 구조.
OpenAI와 비교하면 차이가 또렷하다. 비영리 모자에 영리 자회사 구조였다가 지금 영리 전환 중. 결국 마이크로소프트 자본 논리에 흡수. Google·Meta·xAI는 처음부터 광고·플랫폼 자본주의의 일부.
② 회사명 자체 Anthropic — 그리스어 anthropos(인간). 회사명에 미션이 박혀있다. 미션 텍스트도 명료하다 — “인류가 변혁적 AI를 안전하게 통과하도록 한다.”
③ Responsible Scaling Policy ASL(AI Safety Level)이라는 위험 등급을 자기들이 정의하고, 등급별 안전 조치를 사전에 공개 약속. 자율 규제이고 한계도 있지만, 빅테크 중 이걸 문서화하고 공개한 곳은 거의 유일.
④ Constitutional AI 모델이 무엇이 좋은 답인지를 헌법적 원칙으로 명시해서 학습한다. UN 인권선언·아동권리협약 등을 참조. 블랙박스를 줄이고 가치를 들여다볼 수 있게.
다리오 아모데이가 「Machines of Loving Grace」(2024) 에세이에서 풀어낸 비전도 같은 결이다. AI가 가져올 풍요는 자동으로 오는 게 아니라 누가 어떤 의도로 만드느냐에 달렸다는 일관된 입장.
3. 사회연대경제 일관성
27년 운동의 일관성에서 보면, 이런 선택은 자연스럽다.
- 매장에서 사회적기업 물품을 우선 발주하는 이유
- 조합원이 일반 마트가 아닌 협동조합 매장을 쓰는 이유
- 공정무역 커피를 마시는 이유
전부 같은 논리다. 물건의 효용만 보지 않고, 그 물건을 만든 자의 거버넌스·노동·환경을 본다. 도구도 마찬가지다. AI라는 도구는 누가 어떤 미션·어떤 거버넌스로 만든 것이냐가 중요하다.
4. 함정 — 낭만화 경계
PBC도 결국 자본주의 회사다. 적자에 시달리고, 투자 라운드에 의존한다. 신탁 구조가 만능 보증은 아니다.
모델 가중치는 비공개. 우리는 여전히 API 임차인이지 소유자가 아니다. 서비스 중단·가격 인상·정책 변경에 휘청일 수 있다.
에너지·노동 외부효과는 빅테크 공통 문제. 데이터센터 전력·물 사용, GPU 노동 사슬, 데이터 라벨링 노동.
그러니 정답이 아니라 현재 시점에서 가장 사회적 책임을 진지하게 시도하는 빅테크라는 게 정확한 자리. 우리는 이걸 빌려 쓰면서 동시에:
- 오픈 모델(Llama·Mistral·Qwen 등) 옵션도 열어두고
- 위키·데이터·평가셋은 우리 손에 두고
- 도메인 양육 결과물은 가능한 한 자체 보존하고
- 빅테크가 망가지면 다른 인프라로 옮길 수 있는 이주 가능성을 설계한다
이게 종속 없는 임차의 자세다.
5. 운동의 언어로
“우리는 빅테크 인프라를 빌려 쓰되, 그 빅테크 중 사회적 책임을 가장 진지하게 시도하는 곳을 고른다. 적정기술이 도구의 단위를 묻듯, 우리는 도구를 만든 자의 거버넌스를 묻는다. 이게 사회연대경제 운동이 27년간 매장과 거래에서 해온 일의 디지털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