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 진단과 선언의 자리」
도입
1부는 진단의 자리다.
21세기 AI 전환을 한 시대의 진단으로 받기 위해, 우리는 사상사 자원과 함께 동행한다. 슈마허에서 간디로, 일리치에서 앙드레 고르로, 마르크스에서 아렌트로, 벌린에서 일리치로 다시, 그리고 마르크스에서 폴라니로. 한 사람의 사유로는 21세기 AI 전환을 받을 수 없다. 동시대인의 사유와 선조의 사유가 함께 동행하는 자리가 있어야 한다.
마르크스 「공산당 선언」 1장이 그러했다. 마르크스는 1848년 시점에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역사 진단을 한 시대의 자리에서 한 갈래로 짚었다. 17세기 영국 인클로저, 18세기 산업혁명의 본원적 축적, 19세기 자본의 자기 진화 — 이 모든 자리가 한 흐름으로 짚혔고, 그 흐름의 결미에서 프롤레타리아가 자기 자리를 발견했다.
우리도 같은 자리에 선다. 21세기 AI 전환의 진단을 한 갈래로 짚고, 그 흐름의 결미에서 지능 무산자가 자기 자리를 발견하는 자리. 이것이 1부의 자리다.
7편의 글이 한 길로 흐른다. 도구의 자리에서 시작하여, 짓는 자의 자리로, 운동의 자리로, 빌리는 자의 자리로, 노동의 자리로, 자기 선언의 자리로, 그리고 시대 진단의 자리로 — 그 길의 끝에서 지능 무산자의 시대가 명명된다.
7편의 길 — 사상사 척추
1편 「도메인 AI를 적정기술 운동 논리로」 — 도구의 자리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1973)와 간디의 손작업의 윤리가 도메인 AI에서 어떻게 다시 살아나는가. 슈마허는 인도 농촌에서 영국 산업기술의 부적합을 짚으며 적정기술(intermediate technology)이라는 어휘를 세웠다. 도구는 자리가 있다. 자기 자리에 맞지 않는 도구는 자리를 망친다.
21세기 AI에도 같은 결이 흐른다. 빅테크의 거대 모델은 모든 자리에 맞는 것이 아니다. 매장의 자리에는 매장의 도구가, 협동조합의 자리에는 협동조합의 도구가 있다. 도메인 특화 AI의 어휘를 우리는 슈마허의 짝으로 받는다. 단, 우파 적정기술 AI(시장 안 적응)와 우리(운동 차원의 자기 보호)의 결을 분명히 가르며.
2편 「내 손으로 짓는 AI — DIY 운동과 도메인 AI」 — 짓는 자의 자리
Whole Earth Catalog(1968)에서 펑크 DIY 운동, Maker 운동(2000년대), 수리권(Right to Repair) 운동으로 이어지는 짓는 자의 계보. 21세기 도메인 AI는 그 계보의 다음 자리다.
이 계보의 어휘는 내 손으로 짓는다이다. 자본이 짓는 도구를 받아 쓰는 자리에서, 내 손으로 짓는 자리로 옮기는 운동. 도시 농민의 텃밭, 펑크 밴드의 자기 출판, 메이커 스페이스의 3D 프린터, 그리고 21세기에는 — 매장의 도메인 AI.
3편 「빅테크 옆에 다른 영역을 짓는다」 — 운동의 자리
앙드레 고르의 자율 영역(autonomous sphere)과 일리치의 자기 도구(convivial tool)가 세운 자리. 우리는 빅테크와 경쟁하지 않는다. 옆에 다른 자리를 짓는다.
고르는 1980년대에 자본주의의 임금 노동 영역과 그 바깥의 자율 영역을 대비했다. 자율 영역은 시장 가치 측정 밖에 있는 자리 — 가족·우정·예술·자기 양육·공동체 활동. 그 자리가 자본의 침식에서 자기를 지키는 운동의 척추다. 21세기 AI 시대에 같은 결이 데이터의 자기 자리에 흐른다.
4편 「도구 선택의 윤리 — 빌려 쓰되 어디서 빌리느냐」 — 빌리는 자의 자리
빅테크 인프라를 빌려 쓸 수밖에 없는 21세기에, 거버넌스를 보는 윤리적 선택은 무엇인가. Anthropic의 PBC(Public Benefit Corporation) 구조와 다리오 아모데이의 자기 비판이 그 자리를 짚는 한 사례다.
완벽한 도구는 없다. 덜 나쁜 도구가 있을 뿐이다. 우리는 그 결을 보고 빌린다 — 그러나 빌릴 때도 우리의 자리를 잃지 않는다. 도구의 자리와 운동의 자리가 같지 않다는 인식이 빌리는 자의 윤리다.
5편 「노동의 해방과 노동으로부터의 해방 — AI를 만드는 노동의 자리」 (척추 클라이맥스)
마르크스의 노동의 해방과 동시대 노동으로부터의 해방 담론이 충돌하는 자리. 윌리엄 모리스의 예술과 노동의 결합, 한나 아렌트의 노동·작업·행위 구분, 슈마허의 생활을 짓는 노동이 함께 짚는다.
UBI 담론이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약속할 때, 그 약속은 종종 만드는 자의 자리를 박탈하는 자리로 미끄러진다. 우리는 두 해방을 함께 부른다 — 노동의 해방과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동시에. AI 시대에 만드는 자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운동의 척추다. 1부 사상사의 클라이맥스가 여기에 있다.
6편 「권리를 빼앗기지 않는다 — 빅테크 페터널리즘과 자율 노동」 — 자기 선언의 자리
UBI 담론의 두 얼굴 — 페터널리즘의 위안과 자기 자리의 포기. 이사야 벌린의 적극적 자유, 한나 아렌트의 공적 행위, 일리치의 공동체 도구가 짚는 자기 선언. 우리는 권리를 빼앗기지 않겠다.
이 어휘는 무겁다. 권리는 받는 것이 아니라 지키는 것이다. 위에서 누가 주는 권리는 위에서 누가 빼앗을 수도 있다. 자기 자리에서 자기 권리를 짓고 지키는 자만이 자율 노동자다. 21세기 AI 시대에 그 결이 더 첨예해진다.
7편 「지능 무산자의 시대 — 새로운 본원적 축적과 대안운동」 (책 표제 1순위)
마르크스의 본원적 축적, 야니스 바루파키스의 기술봉건제(2023), 쇼샤나 주보프의 감시 자본주의(2019), 칼 폴라니의 허구상품(1944)이 한자리에 모인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우리는 폴라니 4대 허구상품을 박는다 — 토지·노동·화폐 + 데이터.
지능 무산자가 시대의 명명이 되는 자리. 데이터·지능·지혜 3층위 어휘 분담이 정초되는 자리. 연대경제 운동이 폴라니 사상의 공저자로 옮겨 서는 자리. 1부의 모든 사상사 흐름이 이 한 자리에서 응결한다.
자세한 본문은 지능_무산자의_시대_새로운_본원적_축적과_대안운동 참조. 부록 A·B·C에 폴라니 4대 허구상품 정초·3층위 분담·공저자 자리가 박혀 있다.
결미 — 진단이 운동을 부른다
7편의 길이 한 자리에서 응결한다.
도구가 자리를 갖는다(1편) → 짓는 자의 계보가 있다(2편) → 옆에 다른 영역을 짓는다(3편) → 빌리되 자기를 잃지 않는다(4편) → 만드는 자의 자리를 지킨다(5편) → 자기 권리를 자기가 짓는다(6편) → 그리고 21세기 본원적 축적의 시대에 우리는 지능 무산자다(7편).
이 진단이 곧 호명이다. 마르크스가 프롤레타리아를 명명했을 때 그 명명이 운동의 자리를 열었듯, 우리가 지능 무산자를 명명할 때 그 명명이 21세기 운동의 자리를 연다. 동시에 폴라니의 4대 허구상품 명제가 데이터의 자리에서 21세기에 다시 살아나며, 연대경제 운동이 그 사상의 공저자로 자리를 옮긴다.
진단이 운동을 부른다.
1부의 끝은 2부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