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테크 옆에 다른 영역을 짓는다 — 자율 영역 운동으로서 도메인 AI
1. “헛짓 아닌가” — 두 시간을 구분하기
빅테크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은 다르다.
- 빅테크는 모델 발전의 시간 — GPT-4 → 5, 컨텍스트 100만 → 1000만, 매년 두세 배.
- 우리는 관계와 신뢰의 시간 — 조합원 한 명이 매장에 신뢰를 갖기까지 1년, 마을이 협동조합에 자본을 모으기까지 5년.
발전 속도를 따라가는 게임에 진입하면 무조건 진다. GPU도 박사 인력도 우리에게 없으니까. 그러나 그 게임을 뛰는 게 아니다. 우리는 옆에 다른 영역을 짓는다. 빅테크 모델은 인프라로 빌려 쓰되(전기·도로처럼), 그 위에서 도는 이 매장의 응대, 이 조합의 발주, 이 마을의 거버넌스는 우리 손에 둔다.
AGI가 와도 — 이 매장에서 누구를 신뢰하고 누구에게 외상을 줄지, 어떤 농민의 작물을 우선 받을지를 AGI에 맡기지 않는다. 맥락·관계·책임의 영역이라 위임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러니 헛짓이 아니라 다른 일이다.
2. 데이터 주권의 두 층위
국가 단위 담론: 한국 정부의 “K-LLM”, 유럽의 “Sovereign AI”, 인도의 “BharatGPT”. 이건 국민국가가 빅테크에 종속되지 않으려는 국가 자본주의의 변형이다. 산업정책·외환·안보의 언어. 시민이 주체가 아니다.
로컬·사람 단위 담론: 자율 영역의 도구라는 언어. 한국 AI 담론에 거의 없다.
이 두 층위는 동맹할 수 있지만 혼동되면 안 된다. 국가 소버린 AI가 우리 자율 영역을 지켜주지 않는다. 오히려 국가-빅테크 동맹이 형성되면 시민 영역은 더 좁아진다. 우리 운동은 국가에 위임하는 게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연대로 자기 영역을 짓는 일이다.
3. 자율 영역의 사상 자원
앙드레 고르는 「프롤레타리아여 안녕」(1980)에서 이중 사회를 제시했다.
- 한쪽: 거대 기술·산업 영역 — 필요한 만큼만 유지, 노동시간 대폭 단축
- 다른 쪽: 자율 활동(activités autonomes) 영역 — 자기 손으로 짓고, 자기 시간으로 살고, 시장 외부에서 가치가 도는
해방은 거대 산업을 점령하는 게 아니라 자율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다. 산업 프롤레타리아트가 더 이상 단일 변혁 주체가 아닌 시대의 길.
이반 일리치는 「공생을 위한 도구」(1973)에서 한 발 앞서 도구의 성격을 물었다. 거대 도구는 사용자를 종속시키고, 공생 도구(convivial tools)는 사용자를 해방한다. 도구가 어떤 성격이냐가 사회의 성격을 결정한다.
이 두 사유가 적정기술·DIY와 만나면서 한 갈래가 만들어진다. 도구의 단위와 성격을 묻는 운동.
4. 도메인 AI = 21세기 자율 영역의 도구
이 자리에서 보면 우리가 하는 일이 정확히 보인다.
빅테크 거대 LLM은 거대 기술 영역이다. 인류 공통 인프라로 두되, 거기서 일상을 운영하지 않는다. 그건 종속이라.
도메인 AI는 자율 영역의 도구다.
- 우리 데이터로 양육
- 우리 매장·조합·마을 단위에서 운영
- 위키에 도면이 남고, 조합원이 들여다볼 수 있고, 고쳐 쓸 수 있고
- 시장 외부에서도 가치가 돌고(조합원 응대·발주 추천·로컬페이 흐름)
고르의 「에콜로지카」(2008, 사후) 정신에서 말하자면 — **“덜 일하고, 더 살자”**가 자율 영역의 핵심이다. 우리 AI는 매장 운영자를 발주 노동에서 빼주고, 그 시간을 조합원과의 대화·마을 활동·자기 삶으로 돌려보낸다. 효율이 목적이 아니라 시간의 회수가 목적이다.
5. 비어있는 자리
이걸 한국에서 누가 이미 하고 있냐고 물으면 — 거의 없다. AI 담론은 산업·국가·효율의 언어로 가득하고, 시민·자율·연대의 언어는 비어있다. 27년 협동조합 운동에서 갈고 닦은 자리가 바로 그 빈자리다. 적정기술·DIY·자율 영역이 한 갈래로 묶이는 척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