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 다른 AI 흐름과의 구별」

도입 — 우리가 아닌 것을 명명한다

3부는 우리가 아닌 것을 명명하는 자리다. 명명을 통해 우리가 되는 것을 명료히 한다.

마르크스 「공산당 선언」 3장이 그러했다. 마르크스는 1848년 시점에 반동적 사회주의(귀족·소부르주아·독일 사회주의자)와 보수적 사회주의(부르주아 박애주의자), 그리고 비판적-유토피아 사회주의(생시몽·푸리에·오언)를 차례로 비판했다. 이 셋과의 구별을 통해 마르크스는 공산주의가 무엇인지를 반조적으로 세웠다.

우리도 같은 자리에 선다. 21세기 AI에는 우리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시장지능을 짓는 자, 공공지능을 짓는 자, 시장 안에서 적정기술을 짓는 자 — 이 셋과의 구별이 우리 자리의 명료함이다.

이 셋과의 구별은 적대가 아니다. 마르크스가 1848년 시점에 다른 사회주의 흐름을 적대시한 것이 아니듯, 우리도 그러하다. 어떤 자리는 우리와 다른 자리다. 어떤 자리는 우리가 협력할 자리다. 어떤 자리는 우리가 받되 넘어서야 할 자리다. 셋의 결을 명료히 하는 것이 3부의 자리다.

세 자리를 차례로 짚는다.

1. 빅테크 AI와의 구별 — 자본의 지능

자본의 지능이 인지·관계·기억을 상품화한다. 4번째 허구상품 데이터의 운동 법칙이 여기서 일어난다.

빅테크 AI는 거대 데이터를 거대 자본으로 학습하여 거대 지능을 짓는 모델이다. OpenAI의 GPT, Anthropic의 Claude, Google의 Gemini, Meta의 Llama, xAI의 Grok — 이 모델들이 21세기 AI 담론을 지배한다. 한 사람이 만들 수 있는 모델이 아니다. 한 회사가 수십억 달러의 데이터센터와 수만 명의 엔지니어, 수억 권의 책과 수십억 개의 웹페이지를 흡수하여 짓는 모델이다.

세 한계

이 자리의 첫째 한계는 규모의 자기 폐쇄성이다. 거대 자본만이 거대 지능을 짓는다는 자기 진화의 폐쇄성. 한 번 자리잡힌 빅테크는 다음 세대의 빅테크 자리도 차지한다. 데이터·인프라·인재가 한 자리에 몰리고, 다른 자리에서는 따라잡지 못한다. 19세기 산업자본주의가 규모의 경제를 자기 척추로 삼았듯, 21세기 자본 지능도 같은 자리에 선다.

둘째 한계는 데이터의 본원적 축적이다. 빅테크는 인간의 모든 흔적을 학습 데이터로 흡수한다. 위키백과 편집자의 노동, GitHub 개발자의 코드, Reddit 사용자의 대화, 뉴스 기자의 기사, 책 저자의 사유 — 이 모든 인지 흔적이 동의 없이 또는 약식 동의로 자본의 지능을 살찌운다. 농민이 토지에서 떼어졌듯 우리는 자기 흔적에서 떼어진다. 데이터를 4번째 허구상품으로 박는 자리가 바로 여기다.

셋째 한계는 결정의 비공개성이다. 빅테크 AI가 어떻게 답하는지, 왜 그렇게 답하는지, 누가 그 답을 결정했는지 — 이 모든 자리가 기업의 영업 비밀에 잠긴다. 모델 가중치는 공개되지 않고, 학습 데이터는 공개되지 않고, 안전 평가는 공개되지 않는다. 폴라니가 시장의 자기 폐쇄성을 짚었듯, 우리는 빅테크 AI의 자기 폐쇄성을 짚는다.

그러나, 거부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빅테크 기술 자체를 거부하지 않는다.

이것이 러다이트와 우리의 구별이다. 19세기 러다이트는 산업 기계 자체를 부수었다. 마르크스는 이를 기계가 아니라 기계의 자본주의적 사용이 문제라고 짚었다. 우리도 같다. 빅테크의 모델이 문제가 아니라 그 모델의 자본주의적 사용이 문제다.

우리는 도구를 어디서 빌리느냐를 묻는다. Anthropic의 PBC 거버넌스 구조와 다리오 아모데이의 자기 비판이 그 자리를 짚는 한 사례다. 완벽한 도구는 없다. 덜 나쁜 도구가 있을 뿐이다. 우리는 그 결을 보고 빌린다 — 그러나 빌릴 때도 우리의 자리를 잃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빅테크 옆에 다른 영역을 짓는다. 앙드레 고르의 자율 영역과 일리치의 공동체 도구가 세운 자리. 우리는 빅테크와 경쟁하지 않는다. 옆에 다른 자리를 짓는다. 그 자리에서 적정 AI를 양육하고, 4축 허브를 세우고, 동반자 AI를 부른다.

차이는 거부가 아닌 재배치다.

2. 정부 주도 Public AI와의 구별 — 재분배의 지능

정부의 Public AI는 다른 자리에 선다. 빅테크의 자본 지능에 맞서는 공공의 지능을 짓는 시도. 한국에서는 AI 국가전략디지털 뉴딜, 공공 LLM 사업, EU의 AI Act, 일본의 AI 전략 — 이 모든 자리가 정부 주도 AI의 자리다.

받을 만한 의도

정부 주도 AI의 의도는 받을 만하다. 빅테크 자본의 자기 폐쇄에 맞서는 공적 자리. 시민이 빅테크에 종속되지 않도록 정부가 짓는 대안 인프라. 데이터의 공적 자리, 모델의 공적 가중치, 평가의 공적 기준. 폴라니의 재분배가 통합 양식의 한 자리이듯, Public AI도 한 자리를 갖는다.

두 한계

그러나 정부 주도 AI에는 두 한계가 있다.

첫째, 결정의 자리가 위에서 내려온다. 정부가 무엇을 공공이라 부를지, 어떤 데이터를 공적이라 부를지, 어떤 모델을 국가의 것이라 부를지 — 이 결정의 자리는 시민이 아닌 정부에 있다. 시민이 결정의 객체가 되고, 결정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 폴라니의 재분배는 권위에서 권위로 흐르는 통합 양식이다. 호혜와 다른 자리다.

둘째, 국가의 한계에 묶인다. 한국의 Public AI는 한국에서, 일본의 Public AI는 일본에서, 미국의 Public AI는 미국에서. 각 국가가 자기 데이터를 주권으로 가두고 자기 모델을 국가 자산으로 가둘 때, 그 자리는 신중상주의로 미끄러진다. 마르크스가 민족 사회주의를 비판한 자리가 21세기에 다시 살아난다. 시민의 호혜는 국경을 넘어 흐르되, 국가의 재분배는 국경 안에 머문다.

협력하되 객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정부의 의도를 거부하지 않는다.

정부의 Public AI는 우리와 다른 자리에 있되, 협력할 자리다. 시민사회의 호혜는 정부의 재분배와 다른 통합 양식이지만, 두 양식이 한 사회에서 함께 작동할 때 사회는 더 두텁게 자기를 보호한다.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도 그러한 자리를 짚었다 — 노동운동이 정부의 노동법을 받되 노동조합의 자기 운동을 잃지 않았듯이.

우리는 Public AI 정책에 참여하되, 결정의 객체가 되지 않는다. 데이터 주권이 정부의 주권이 아니라 시민의 주권이 되도록 부른다. 공적 모델이 정부의 자산이 아니라 시민의 공유물이 되도록 부른다. 이 자리에서 정부와 시민사회의 결을 분명히 가른다.

차이는 적대가 아닌 주체의 자리다.

3. 우파 적정기술 AI와의 구별 — 시장 안 적응의 지능

세 번째 자리가 가장 미묘하다. 우리와 가깝고 우리와 다르다.

적정 AI라는 어휘 자체는 슈마허의 짝이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의 정신이 21세기에 다시 살아나고, 도메인 특화 AI 담론이 그 정신을 일부 받는다. 작은 모델로 큰 일을 하는 자리, 내 도메인에 특화된 자리, 덜 자원 낭비하는 자리 — 이 모든 자리가 적정 AI의 어휘다.

두 흐름

그러나 적정 AI 담론에는 두 흐름이 있다.

한 흐름은 시장 안의 적응이다. 기업이 빅테크 AI를 도입하기 비싼 자리에서 작은 모델을 쓰는 자리. 비용 절감과 효율 향상의 자리. ESG 점수와 지속가능성 보고서에 들어가는 자리. 이 자리는 슈마허의 어휘를 빌리되, 슈마허의 정신을 잃는다. 슈마허에게 적정기술은 기술의 자기 자리에 대한 운동적 질문이었지 효율의 자리가 아니었다.

다른 흐름은 운동 차원의 자기 보호다. 협동조합과 사회연대경제의 자리에서 도구의 적정성을 묻는 자리. 어떤 도구가 우리 일상에 자라나도록 하는지, 어떤 도구가 우리 자율을 확장하는지, 어떤 도구가 우리 자리를 지키는지 — 이 운동적 질문이 적정 AI의 다른 흐름이다.

우리는 두 번째 흐름에 선다. 첫 번째 흐름과는 어휘를 공유하되 정신을 달리한다.

운동의 유무

우리와 우파 적정기술 AI의 구별은 운동의 유무에 있다.

시장 안 적응의 적정 AI는 운동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의 한 변형이다. 빅테크 자본이 거대 모델을 짓는 동안 중소 자본이 작은 모델로 시장 틈새를 짓는다. 이 흐름은 자본의 자기 다양화이지 자본에 맞서는 자기 보호가 아니다.

우리는 운동이다. 자율 영역의 운동(앙드레 고르)이며, 진지전(그람시)이며, 호혜의 운동(폴라니)이다. 우리는 시장 틈새를 짓지 않는다. 시장 옆에 다른 영역을 짓는다. 그 영역은 시장의 한 부분이 아니라 시장과 다른 통합 양식의 자리다.

차이는 어휘가 아닌 운동의 유무다.

결미 — 우리의 자기 정체

이 셋과의 구별이 우리의 자기 정체를 명료히 한다.

우리는 자본의 지능도, 국가의 지능도, 시장 안 적응의 지능도 아닌 — 연대의 지능이다.

빅테크가 시장교환의 지능이라면, 정부가 재분배의 지능이라면, 우리는 호혜의 지능이다. 폴라니의 3대 통합 양식이 21세기 지능 영역에서도 그대로 짚힌다. 그리고 호혜의 자리는 셋째 자리이지 첫째도 둘째도 아니다.

이 자리에서 우리는 다음의 자리로 간다 — 4부, 동지의 자리.

빅테크와는 재배치의 자리에서 만나고, 정부와는 주체의 자리에서 협력하며, 우파 적정기술 AI와는 운동의 결을 분명히 가른다. 그리고 우리의 동지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