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지능 — 21세기 품앗이를 같이 짓자는 제안

2026년 4월 27일 김성훈 드림

들어가며 — 4월 25일에 못 한 말씀

지난 4월 25일 워크숍에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날 자리에서 저는 도메인특화AI 사업이라는 정부지원사업의 형식·요건·심사·컨소시엄 구도를 중심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업 통과 가능성에 마음이 매여 있었던 탓입니다. 모인 분들의 시간을 사업 통과의 짜맞추기에 쓰게 한 것에 대해 송구한 마음이 남습니다.

그러나 회의 후 며칠이 지나면서 다시 확인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날 풀어야 했던 진짜 이야기는 사업의 통과·서식·점수 매트릭스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길을 같이 가고자 하는가 하는 방향이었습니다. 방향은 이미 점검할 필요 없는 동지고, 중요한 것은 당장 입금이 되는 실전일 거라 생각도 있습니다만 정말 그런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사업의 형식이 방향을 가리면, 사업은 통과되더라도 운동은 멈춥니다. 사람이 모이지 않습니다.

오늘 이 글은 그날 못 드린 방향에 대한 말씀입니다. 정부지원사업 한 라인에 대한 사업 제안서가 아니라, 제가 앞으로 가고자 하는 길에 대한 솔직한 공유로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1. 견딜 수 없는 것 — 우리가 살고 있는 자리

사춘기 시절 수업료를 못 내 아침 조회시간마다 교실에서 불러 세워질 때의 수치심이 어쩌면 저를 “자본주의 극복”의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 힘이었을 겁니다. 그 이후 얕은 지식과 사상의 학습은 이 개인적 감정을 사회화하기 위한 것이었을 겁니다.

사회연대경제의 그 물질적, 사상적 토대가 급속히 붕괴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임금노동사회의 출현과 그에 대응한 노동자 결사체운동을 사회연대경제의 핵심으로 본다면, 이미 임금노동사회가 무너지고 있으니까요. 다만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의 편에서 생각한다는 것만은 여전한 원칙이라고 생각합니다.

칼 폴라니가 거대한 전환에서 짚어준 자리를 다시 봅니다. 자본주의는 본래 상품이 아닌 것 — 토지(자연), 노동(인간 활동), 화폐(구매력) — 을 상품으로 만들어 사회를 파괴해 왔습니다. 폴라니는 이 셋을 허구상품(fictitious commodities) 이라고 불렀습니다.

한밭레츠, 민들레, 품앗이생협, 주민운동은 이 세 허구상품에 맞서 사회를 다시 사회의 손에 모시려는 되찾기의 운동이었습니다. 우리가 30년 가까이 함께 해온 일이 바로 이 자리입니다. 로컬푸드는 토지와 농산물을, 햇빛소득마을은 에너지와 노동을, 지역화폐는 화폐의 흐름을 — 자본의 손에서 사회의 손으로 모셔오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 가지가 더 추가되었습니다. 데이터입니다.

토지·노동·화폐의 다음으로, 자본, 빅테크는 인류 모두의 일상이 만들어 온 데이터를 자기 자산으로 사유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데이터로 키운 인공지능을 가지고 다시 인류의 일상을 자기 시장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21세기 새로운 인클로저(enclosure)입니다. 15세기 영국에서 마을 공유지를 울타리로 둘러 사적 소유로 만들었던 그 운동이 21세기에 데이터의 자리에서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OpenAI, 구글, 메타, 엔트로픽 그리고 그 뒤의 대형 자본은 우리가 한 번도 주겠다고 한 적 없는 데이터를 긁어 모으고, 전 세계 개발자들이 무료로 나눠준 소스로 인공지능을 만들어, 다시 우리에게 팔고 있습니다. 인공지능은 본래 인류 총합의 지능입니다. 누구의 것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허구상품으로 만들어 사적 이윤의 도구로 삼는 것이, 지금 카지노 자본주의가 가진 가장 치명적인 21세기 정점입니다.

그리고 그 빅테크의 데이터 센터는 우주 에너지를 사유화하고 독점하는 자리로 나아가며 미래 세대의 생존의 기회를 빼앗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견딜 수 없는 반골기질이 동력이 됩니다. 개인적으로 지난 몇 년간 우리가 이런 현실을 극복하기 어렵다는 절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다 역설적이게도 그 빅테크가 만든 AI를 만나 다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위기인가, 기회인가”


2. 사회지능, 우리 말로 품앗이

상품이 아닌 것이 상품으로 둔갑하며 사회가 망가지는 것에 데이터를 추가하면서 다시 “나눔”에 대하여 생각합니다.

토지를 나누고(공유지·생협 매장), 노동을 나누고(협동노동), 화폐를 나누고(지역화폐), 햇빛을 나누고(햇빛마을) — 우리가 이미 살아온 길입니다. 이 일을 우리 말로 부르면 품앗이입니다. 마르셀 모스가 연구했듯이 이름만 달랐을 뿐 인류가 지금껏 살아온 나눔의 관계원리로 살아왔습니다.

데이터·지능도 당연히 그랬습니다. 그래서 자본이 가둔 인공지능에 맞서, 우리가 만들어야 할 것은 사회지능(Social Intelligence) 입니다. 누군가는 공공지능이라 말하지만 저는 사회지능이라 부르고자 합니다. 위로부터의 행정·국가가 운영하는 인공지능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사회의 결집·관계망이 운영하는 인공지능. 사회연대경제(Social Solidarity Economy, SSE)의 21세기 자연스러운 확장입니다. SSE → SI.

사회지능, 우리 말로는 품앗이. 토지·노동·화폐를 품앗이로 살아온 우리가, 이제 지능까지 품앗이 한다. 나누면 더 커진다.

이 길의 결을 세 가지로 정리합니다.

첫째, 쥐는 게 아니라 나눔입니다. 자본의 게임을 거꾸로 뒤집어 우리가 데이터·지능을 쥐어오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같은 인클로저의 반대편 거울일 뿐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누구의 소유도 되지 않는 자리에 인공지능을 놓는 것입니다.

둘째, 나누면 더 커집니다. 스티븐 코비가 말한 빈곤의 심리에서 풍요의 심리로의 전환입니다. 토지·노동·화폐는 나눌 때 마음의 결단이 필요한 영역이지만, 데이터·지능은 본성상 나눌수록 자라는 자원입니다. 자본이 데이터와 지능을 가둔 순간 본성에 어긋난 게임이 시작된 것이고, 우리는 풍요의 결단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본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셋째, 품아이라는 이름은 처음부터 이 자리에 있었습니다. 품앗이 + AI = 품아이. 인류 총합의 지능을 우리 마을의 품앗이로 모시는 자리. 그래서 품앗이는 품앗이생협만의 고유명사일 수 없기에 poomasi.org는 품아이로 두고 품앗이생협은 서브(seed.poomasi.org)로 옮겼습니다.


3. 어떻게 같이 가는가

“Start where the people are, with what they have.”

너무 큰 이야기로 마무리하지 않으려 합니다. 큰 이야기는 풀무학교가 말하는 “위대한 평민”을 무력하게 합니다. 사울 알린스키가 평생 강조한 자리이지요 — 사람이 이미 가지고 있고 알고 있는 것에서 출발해서, 작은 승리를 쌓아 더 큰 승리로.

이 길에서 우리가 같이 갈 자리들을 다음과 같이 그려보았습니다.

가. 조직화의 자세 — 저항의 결집부터

운동의 시작은 대안의 결집이 아니라 저항의 결집입니다. 내가 그리는 좋은 세상에 들어오라는 청보다는 우리가 같이 못 견디는 것에 같이 맞서자는 자리에서 사람이 모입니다. 우리는 이미 토지·노동·화폐 셋을 사고파는 것에 못 견뎌 30년 가까이 함께 와 있습니다. 4번째(데이터·지능)는 새로운 전선이지만 같은 운동입니다.

나. 인프라 — 위키와 현장의 결합

지난 3~4개월 AI를 만지면서 몇 가지 자동화 프로그램을 만들다가 사회지능의 AI를 설계해보고 움직여보면서 다시 알게 되었습니다. ‘아, 이것이야말로 조직화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사회지능은 책상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인간과 공동체, 지역사회 현장에서 나오는 데이터로 자라야 합니다. 매장에서 일어나는 거래, 마을에서 나오는 회의, 결제에서 흐르는 흔적, 교육에서 빚어지는 이야기들 — 그것이 사회지능의 양식(糧食)입니다. 자본 인공지능이 익명의 웹을 긁거나 자신의 윤리판단에 따라 제3세계 저임금 노동으로 데이터를 먹여 자란다면, 사회지능은 얼굴 있는 사람의 손과 발에서 자랍니다.

이 데이터가 모이고 흐르는 자리로 이미 한 발 시작된 곳이 있습니다. 위키입니다. 위키백과의 지식공유를 AI에 접목시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안드레이 카르파티(Andrej Karpathy)가 이 개념과 시스템을 공유한 이후 전 세계 AI 유저들이 옵시디언이라는 도구를 활용하며 급속히 확산되고 있습니다. 위키는 어디서나 시작되고, 누구나 편집하고, 위계 없이 연결되는 그물입니다. 수목형이 아니라 리좀형 인프라. 들뢰즈와 가타리가 짚은 그 형태입니다. 한 회사가 통제하는 자본 인공지능과 정확히 반대편의 형태입니다. 품아이를 키우면서 적용하고 있습니다. (wiki.poomasi.org)

다만 위키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위키가 책상 위에 머물면 추상이 됩니다. 우리 위키는 매장·마을·교육·결제 현장과 끊임없이 대화하면서 자라야 합니다. 현장 ↔ 위키 ↔ 사회지능 모델 ↔ 다시 현장. 한 번 학습하고 굳어버리는 자본 인공지능과 달리, 사회지능은 끊임없이 요동치고 생성되는 진리체계입니다. 이것은 파울로 프레이리가 평생 말한 대화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진리가 위에서 일방으로 입금되는 은행예금식 교육이 아니라, 같이 빚어지는 자리.

다. 작은 승리 — 매장 일상에서

가장 가까운 첫 작은 승리는 매장 일상에 있다고 봅니다.

발주·정산·조합원 응대·홈페이지·결산 — 매장의 작은 결정들이 인공지능과 사람의 대화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정·대화·기록이 위키에 박히고 있습니다. 자랑할 일은 못 되지만, 사회지능의 첫 시연이 이미 진행 중이라는 의미는 됩니다.

다른 매장 분들이 보시면 “우리 매장에서도 이렇게 살 수 있겠다” 하는 응답이 자연스럽게 나오리라 생각합니다. 매장에서 마을로, 마을에서 교육으로, 교육에서 결제로, 결제에서 정책으로 — 작은 승리가 천천히 자라날 자리입니다. 한 번에 큰 시스템을 박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살아있는 자리에서 한 발씩 보태는 길입니다.

라. 거버넌스 — 미리 못박지 않되 원리는 분명히

지금 단계는 담론·아이디어 단계여서 운영구조를 미리 못박을 수는 없습니다. 못박을 수 있다 하더라도 위에서 먼저 박는 것보다 사람들이 모이고 움직이면서 자연스럽게 자라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다만 원리는 분명합니다.

  • 주고받기 — 사고팔기 아닙니다. 품앗이는 거래가 아닙니다.
  • 받기만 하면 자격을 잃습니다. 품앗이의 오랜 규율입니다.
  • 자유에는 자율이 있어야 합니다. 자율 없는 자유는 운동을 죽입니다.

나눔만큼의 책임, 책임만큼의 권한. 1인 1표 공화주의가 추상적 평등에서 멈춘다면, 사회지능 거버넌스는 구체적 기여 위에서 자라나는 살아있는 자율 공동체로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구체적인 운영의 결은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같이 빚어가야 할 일입니다.

이 개념에 따른 온라인 품앗이마을의 기초설계 중입니다. (wiki.poomasi.org/village/) 현실의 현장과 온라인 가상을 연결시키고 이 과정에 데이터의 주고받음으로 품아이를 키우고 공동체의 기여에 따른 의사결정 권한을 주는 방식입니다. 이는 고대 신시로부터 내려온 말빨에 따른 의사결정 방식인 화백회의 모델을 참고하고 있습니다.


4. 사상적 토대 — 제가 의지하고 있는 자리들

이 길은 저 혼자 짓는 길이 아닙니다. 여러 사상가들의 어깨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길게 풀지 않고 짧게 적어둡니다.

  • 칼 폴라니 — 토지·노동·화폐가 허구상품이 되어 사회를 파괴했다는 진단. 우리는 데이터를 4번째로 추가합니다.
  • 사울 알린스키 — 조직화 방법론. 저항의 결집이 우선이고, 작은 승리에서 큰 승리로.
  • 파울로 프레이리 — 대화의 교육학. 자본 인공지능이 은행예금식으로 진리를 일방 주입한다면, 사회지능은 대화로 같이 빚는 자리.
  • 마르셀 모스 — 증여론. 이름만 달랐을 뿐 인류가 지금껏 살아온 나눔의 관계원리.
  • 들뢰즈와 가타리 — 수목형이 아닌 리좀형. 위키의 시스템이 정확히 그것입니다.
  • 안토니오 그람시 — 진지전과 기동전. 이 길은 단발 충돌이 아니라 시민사회 일상에서 헤게모니를 천천히 쌓는 장기전입니다.
  • 그리고 한국 토착의 결 — 한살림의 모심·살림, 협동조합의 함께, 농민운동의 가꾸기·지킴, 풀무학교의 위대한 평민, 그리고 무엇보다 품앗이.
  • 고대 동아시아의 신시와 화백회의 — 말빨에 따른 자율 의사결정의 토착 모델.

서구 사상의 결과 한국 운동의 토착어가 한 자리에 결합한 곳이 사회지능 운동의 사상적 토대입니다. 이 자리를 같이 깊이 풀어 가는 일도 앞으로 우리가 할 일 중 하나입니다.


5. 이 길의 호흡 — 도메인특화AI 사업의 자리

마지막으로 5월 7일 마감인 도메인특화AI 사업에 대해 한 말씀 드립니다.

이 사업은 25억 원 규모의 정부지원사업이고, 사회연대경제 도메인 인공지능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자리입니다. 다만 분명히 해두고자 하는 것은, 이 사업이 본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사업은 제가 앞으로 가고자 하는 사회지능 운동의 길에서 하나의 수단일 뿐입니다. 통과되면 조금 빨라지고 떨어져도 길은 갑니다. 24개월 사업 통과 여부보다, 방향을 같이 합의한 사람들의 나눔에 대한 결사가 더 중요합니다. 도메인특화AI 사업은 쏟아지고 있는 AI 지원사업의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원사업 없이도 할 수 있는 만큼 해 나갈 것이고, 필요하면 여러 지원사업을 수단으로 속도를 낼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속도보다 방향입니다. 지원사업은 떨어져도 일은 가지만 함께 하는 사람이 없으면 지원사업은 되어도 일은 멈추거나 산으로 갈 테니까요.


6. 도메인특화 AI 모델 개발사업 준비

그렇다 하더라도 일단 칼을 뽑았으니 5월 7일까지는 도메인특화 AI 개발사업에 집중하겠습니다. 그날 이야기 나온 다른 AI 기술보유 기업 등을 주관기관으로 하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제 독특한 성정상 철학을 알 수 없는 업체가 그 어떤 기능과 역량을 갖추고 있더라도 그곳에 핸들을 맡길 수는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일이든 관계든 외연을 넓혀가야겠습니다만 지원사업 전에 새로운 파트너 조직과 일을 같이할 수 있는지 판단할 근거와 역량이 제게는 없습니다.

그리고 제 견해로는 이 사업이 제시하는 특정 “기능 중심”의 AI 모델 개발 사업은 하고 싶지도 않고 할 필요도 없는 사업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자유공모형”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과제명과 모순된 기능 선택의 모순을 모른 척하면서 돈을 따내고 보자 하는 생각도 잠시 하였습니다만 그러자면 된다 하더라도 2년간 그 일을 하면서 계속 편법을 연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지나친 이상주의가 저를 늘 곤궁하게 만들어왔음을 알지만 제가 그런 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4월 30일까지 사업계획서 세부안을 만들어 올릴 테니 함께 하실지 정해주시면 형편껏 하겠습니다. 어쨌든 현장은 “로컬푸드 직매장 + 시민에너지 + 지역화폐 + 사회연대경제 지원”을 다 엮어서 그것의 시너지를 내는 것과 향후 비전까지를 다 통합할 생각입니다.

2026년 4월 27일 김성훈 드림